Make your own free website on Tripod.com

<10> 다다이즘 Dadaism(1915~1922)

1>다다이즘 개요

1.1915~1922년경 스위스,독일,프랑스 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반합리적인 예술 운동으로 1차대전을 낳게 했던 전통적인 문명을 부정하고 기존의 모든 사회적,도덕적 속박에 서 정신을 해방시켜 개인의 진장한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이 운동의 근본 정신이었다. 전통의 가치,이성의 우위,예술의 형식을 부정하고,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적 자유와 본연의 감정,우연성,비합리성과 직관적인 것만이 이 시대를 구할 길로 여겼다.

2.다다의 명칭은 아르프에 의하면 1916년 2월6일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든 국제적인 전위 예술 가 그룹이 그들의 회합 장소인 카페 '볼테르'에 증축한 화랑을 위해 <트라스탄 차라>가 선택 한 것으로 프랑스어의 장난감 목마를 뜻하는 것을 라두스어 사전에서 우연히 우연히 끄집어 낸 것일뿐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그 외에도 그 기원에 대하여는 <휴고발>과<휠젠벡> 에 의해 독-불 사전에서 발견됬다는 등 여러 이론이 많지만, '다다'라는 말은 1916년5월15일 <휴고발>에 의해 캬바레 '볼테르'의 인쇄물에 의해 대중에 선보였다.

3.다다는 1916년 1)스위스<취리히>를 시작으로 하여 1919년에 절정에 이르러 유럽 전역으로 퍼 져갔고

2)미국의 <뉴욕>에서는 취리히와는 독자적으로 이미 제일먼저 전개된바 있으며 지방분 권적인

3)독일에서는 <베를린>,<하노바>,<쾰른>에서 각자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4)프랑스의 <파리>에서는 전쟁의 종결후 뒤샹,만레이,아르프,피가비아,짜라,에른스트등 다다 의 중요 작가들이 모여들어 모험과 시위의 현장이 되나 초기의 열정은 사라졌고 개개의 다다 이스트가 되면서 다다의 의미는 퇴색되어 갔다.

4.1922년 5월 <바이마르>에서 몇몇의 다다이스트들이 모인자리에서 다다의 조사(弔辭)가 읽혀 짐으로 다다의 역사는 끝나고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의 선언과 더불어 다다는 초현실주의에 생명을 부여하고 소멸하게 된다.

2>다다이즘 배경

1.19세기 중엽에서 말기까지는 아담스미스의 예정조화설로 설명되어지던 경제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에 오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자율적 문화가 깨지고 독점 자본주의가 대두되면서 제국주의적 사회문제와 함께 문화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2.경제적,정치적,사회적 불안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영향은 새로 운 체재로의 재편성 기간으로 나타나는데 예술에 있어서도 1915년 이후 두가지 방향으로 전 개된다. 즉 당시의 위기적 상황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과 재편성 하려는 반응이 함께 나타난 것이다.이 두갈래중 회의적인 반응은 심화되어져서 완전한 무정부주의인 <다다>에 이르렀고 재편성하려는 쪽의 <추상미술>로 나타났다.

3.1차 대전중 전쟁의 참화와 파괴에 의한 가치관의 전도,전통적 유럽적 가치에 대한 일체의 불 신은 인간의 이성과 문명,예술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나타났고 전쟁으로 인해 스위스에 모이 게된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비합리적이고 우연적인 예술,반문명,반예술 성격의 다다 운동을 벌여 나갔다.

4.미술에 있어서 다다의 출발점은 1차대전 이전에 확립되어 있었고 입체파와 미래파가 다다형 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즉 다다에서 등장한 콜라쥬는 입체파의 파피에 콜레등의 기법 에서 연유하였으며, 조형상의 문제에 앞서 기존질서에 대항하여 가장 격렬하게 도전한 최초 의 반전통 미술운동이었던 미래파에서 도발과 망아적(忘我的) 주제와 기술을 영향받았는데 특히 다다가 선언문을 발표한것과 포스터, 삐라를 만들때 여러가지 활자,부호들을 어지럽게 사용한 자연배열법(Ray-out)은 미래파의 생각을 구현한 것이다.

3>다다이즘 지역별 전개

1.스위스- 취리히 다다(1916~1919):발,짜라,쟝코,아르프,휠젠벡,리히터

*1916년2월1일 독일 출신 극작가 <휴고 발>에 의해 문을 연 카바레 '볼테르'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에서 모여든 젊은 예술가들로 구성된 다다그룹에는 시인 <트라스탄 짜라>,루마니아 화가 겸 조각가 <마르셀 쟝코>,알자스 출신 화가 <한스 아르프>,후에 저명한 실험 영화 작가가 된 <한스 리히터>등에 의해 반예술 운동이 전개된다.

*짜라와 그의 동료들은 추상미술을 부르조아 가치체계의 반영인 자연주의 회화를 파괴하기 위 한 무기로 사용하는 한편 신문기사의 낱말을 오려내어 흔들어 떨어지는 순서대로 무의미한 시 를 낭송하고 불협화음의 재즈음악을 연주하고 즉흥적인 춤을 공연하였다.

*아르프에 의해 대표되었던 다다미술은 전적인 추상,최소한 구성의 절대적인 순수성이 요구되 었다.그는 의식의 우연의 법칙 발견에 큰 의의를 두어 손으로 찢은 색종이를 떨어뜨려 우 연의 법칙에 따라 배치하고 다음에 자연스러운 배치를 신중히 조정했다.

*다다가 얻었던 결론은 우연은 예술창작의 새로운 자극제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러 한 실험작업은 다다를 이전의 다른 예술운동과 구별시키는 것이었다.

*취리히 다다가 참으로 목표했던 것은 짜라에 의하면 "전쟁의 한 가운데 모든 상대적 진리성 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상대적인 진리만을 보증하는 자기의 자발성 중에서만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2.미국- 뉴욕 다다(1915~1920):뒤샹,피가비아,만레이

*뉴욕다다의 이념은 순수예술로서의 사진을 개척한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 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1913년 열린 미국 현대미술의 기초가 된<아모리 쇼>Armory Show 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291 화랑'의 전신인 '사진분리파의 작은화랑'을 설립하여 유럽의 새 로운 경향의 미술을 대중에게 소개 하였다.

*스티글리츠는 1915년에는 뒤샹과 피가비아의 도움을 받아 이 작가들의 반예술 사상을 발표하 는 정기간행물<291>을 창간하였다. 취리히 다다운동보다 연대적으로 앞선 필적할만한 사상이 뉴욕의 한 그룹에서 독립적으로 발효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셀 뒤샹은 <아모리 쇼>에서 미래파적 작품인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로 센세이션을 일으 킨고 이어서 기성의 예술개념에 도전하여 '전통적인 회화 도구'를 버리고 일상의 현실속에서 <발견>되는 비개성적인 기성제품을 '심미적인 감각'의 작용을 배제한 가운데 <선택>하여 서 명하거나 도발적인 제목을 붙여 미술작품으로 전시한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창조했다. 1913년 최초의 레디메이드인 <자전거 바퀴>가 제작된 이래 1917년 뒤샹은 <샘>이라고 명명한 남자 소변기를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에 출품하여 거부당한다.

*피가비아는 선천적 무정부주의자로 1913년 <아모리 쇼>에 참가하여 스티글리츠의 친구가 되 며 그의 화랑에 초대되어 기계스타일의 회화와 콜라쥬작품을 제작하여 잡지<291>에 발표한다

*만 레이는 피가비아가 정열적인 파괴자,뒤샹이 초연한 반항자였다면 염세적이며 꾸준한 발명 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인데 이들은 뉴욕 다다의 삼두체제를 형성 하였다.화가로서 출발한 만 레이는 광고전문가로,사진작가로 활동을 시작 하였는데 그에게 있어 중요한것은 <무용한 것의 발견>이었으며 물체도 인간처럼 존재하고 있다는게 그의 사상의 골자이었다. 그는 감광 지에 대상을 직접 인화하는 <레이오그램>을 창안했고, 기성의 오브제를 다양하게 결합한 <레 디메이드>와 그외에 기성의 이미지와 물체를 더 복잡하게 결합한 <아쌍블라쥬>를 제작했다.

*1920년경 뒤샹과 피가비아,만 레이가 유럽으로 떠남으로써 뉴욕 다다는 해체되게 된다.

3.1)독일-베를린 다다(1918~1923):라울 하우스만,죤 하트필드,게오르그 그로츠,휠젠벡

*1917년 취리히에서 돌아온 휠첸벡은 베를린 다다의 대변가가 되어 1918년에는 다다연감을 발행하고 하우스만,하트필드,그로츠등과 함께 다다그룹을 결성하여 <다다그룹>이라는 잡지도 출간했다.

*베를린은 당시 전쟁후 극도의 정치,사회적 불안 가운데 있었기에 베를린 다다는 강한 정치적 성향으로 나타나며 반군국주의적이고 반부르조와적인 정치적 선동과 선전물을 통하여 전파되 어 나갔다.뉴욕 다다가 현대 예술에 대한 위기의식에서라면 베를린 다다는 유럽문화 일반의 위기를 문제시 했기에 무정부주의적이고 사회 비판적이었다.

*1918년 다다의 일원인 '바아더'는 그의 다다선언을 통하여 표현주의를 그 내향적 성향때문에 부정하고 짜라의 동시시(同時詩)와 유사한 음성시를 제창함으로서 회화를 통한 새로운 소재 의 사용을 요구하였다.

*베를린 다다의 가장 독창적인 성과는 사회 비판적인 풍자가 강한 포토몽타쥬를 발전시킨 점 이다.신문,잡지 등에서 오려낸 사진과 인쇄물을 모순되게 재결합하여 일상적 모습을 잃게하 고 유동적 의미를 부여하여 전통적 예술가 개념을 부정했다.이러한 베를린 다다의 성향은 사회적 사실주의 형식의 신즉물주의에 영향을 끼친다.

*베를린다다는 1920년에 열린<제1회 국제다다 견본시>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반예술을 열었다.

2)독일-하노버 다다:슈비터스

* 하노버에서는 슈비터스가 독자적인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예술의 죽음이나 반예술,무예술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그는 전통적 재료를 포기하고 유기물과 쓰레기로 만들 어진<메르쯔 빌트><메르쯔 바우>등 <메르쯔>라고 명명한 콜라쥬작업을 하였는데 이 명칭은 상업은행(Commerz Bank)이라는 말에서 얻은 특별한 의미는 없는 말이다. 그는 폐품을 콜라쥬 하여 다다가 예술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지 못할때 그가 하는 모든것이 예술 이라하여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3)독일-쾰른 다다:막스 에른스트, 요하네스 바이겔트

*1919년 에른스트와 바이겔트는 다다 W그룹을 결성하였고, 1920년 4월짜라,아르프,아라공, 브 르통등이 참가한 <다다 조춘전>은 전시기간중 철거당한 사건으로 절정에 이른다.에른스트와 바이겔트는 다다간행물과 후에 초현실주의에 중요한 기법이 되는 <프로타쥬>를 시도 하였다.

*막스 에른스트는 사물들의 표면이 사물들의 본질을 공략할 수 있을 정도로 표면을 전환시켰 는데 기계 기술은 아이러니를 가진 현실의 비인간화의 상징으로 취급되었다.에른스트는 아르 프와 친밀했음에도 회화나 콜라쥬 조각의 접근방식이 달랐는데 아르프가 인물등 대상을 암시 는 하지만 드러내지 않는 유기적,추상적 접근방식인 반면 에른스트는 키리코의 예를 따라 상 상력을 가미하여 마술적 사실주의를 이용하는 초현실주의의 한 분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에른스트가 1921년 쾰른을 떠나고 바이겔트가 회화를 포기함으로 쾰른다다는 끝난다.

4.프랑스-파리 다다(1919~1922):앙드레 브르통,루이 아라공,필립포 수뽀(에른스트,아르프, 짜라,피가비아,만레이,뒤샹)

*전쟁 말기에 이르러 다다 운동은 프랑스의 수도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그것은 주로 문학적인 본질을 갖고 있었고 회화나 조각에서의 다다는 주로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었기에 문학적 풍토 에서 과거보다 더 격렬한 선언서,발표회,간행물,이벤트,해프닝 등이 빈번히 이루어 졌다.

*아르프,에른스트,피가비아등의 작가들은 독자적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비활동적이었다

*다다는 초기의 열정과 충격은 결여되 갔고 1921년 <바레스 재판>이라는 집회사건이후 허무주 의적 피가비아와 반예술의 짜라 그리고 새로운 개념을 찾으려는 브르통은 각기 주장에 의해 결별하고 분파가 생겨났다.

*다다는 초기의 열정은 사라지고 그룹에서 개개의 다다이스트가 되면서 다다의 의미는 퇴색되 고 1922년 짜라에 의해 조사가 읽혀지며 막을 내리고 1924년의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과 더불어 다다는 초현실주의에로 생명을 부여하고 소멸하게 된다. (독일의 현대미술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