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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현대미술여행 2001년 10월 작가연구 29호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을 우리눈으로 읽고 우리의 시각을 찾고자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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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쎌 뒤샹(Marcel Duchamp)

백기영 (뮌스터 미대)

*옆의 그림을 클릭하시면 작가연구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보다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소위 과학의 법칙이라는 것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그러나, 타당성이라는 면에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허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스스로를 작은 신이라고 착각한다. 나는 이점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것이 전부다. '법칙' 이라는 단어는 나의 원칙에 위배된다.과학은 분명 순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50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법칙이 발견되어 모든것을 변화시킨다.우리가 왜 그렇게 과학을 숭앙하는지 알수가 없다.그때문에 나의 표현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나는 모든 의미에서 사이비라고 할 수 있다. 진지한 삶은 견디기 힘들다.그러나 진지함이 유머와 함께 할때 , 보다 훌륭한 색채를 띄게된다"(마르쎌 뒤샹)

20세기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거장을 들라고 한다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마르쏄 뒤샹을 언급할 것이다.그는 현대미술의 가장 난해한 논란들을 일으켰던 사람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정확한 해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1917년 미국의 앙데팡당 전에서 "샘"이라는 제목의 남성용 변기를 전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고,이후 "레디메이드"를 일종의 산업생산품을 작가가 오로지 취사 선택해 전시함으로 예술의 문맥에 끌어들인 장본인 이다.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역사적 시점에 그들의 기치를 다하고 이내 사그러 들었지만 뒤샹은 자신의 평생을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살았던 사람이다.우리는 이와같은 뒤샹의 생애와 작업들을 들춰봄으로서 지금까지도 남아 움직이고 있는 그의 예술정신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후예들의 예술을 다시 읽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르쎌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노르망디 근처에 있는 프랑스 르왕(Rou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오이게네 뒤샹(Eugene Duchamp)은 공증사로 부유한 가정을 이루고 있어고 나중에 10년이란 기간을 르왕의 존경받는 시장으로 있었다.그러한 부유한 집안의 육남매중 셋째로 태어난 뒤샹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순종적이고 내성적인 편이었다.형제중의 세명이 예술가가 되었고, 뒤샹은 늘 다른 형과 동생의 뛰어난 손재주를 흉내내는 형편이었다.맏형인 가스통 뒤샹은 파리에서 자크 비용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여 입체파가 융성하던 시기에 이름을 떨치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고,아래 동생인 레이몽 뒤샹은 의학공부를 중단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레이몽 뒤샹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조각가가 되었다.동생 레이몽은 뒤샹이 뉴욕에서 이름을 날린 뒤에도 파리에서는 마르쎌 뒤샹 보다 레이몽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정도로 명성있는 조각가가 되었지만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1902년 뒤샹이 12살때 그렸던 현존하는 최초의 뒤샹의 그림"블래빌 성당"을 보면 인상주의에 아주 강한 인상을 받고 있었다.당시 뒤샹 가족의 작은 초원 같은 집 건너편에 있었던 이 작은 교회를 그렸던 뒤샹은 또한 동생 수잔과 가족들의 초상을 즐겨 그렸다. 그의 필치는 간결하고 "예술가의 아버지"등 가족들의 초상들에서는 세잔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그는 1907년 부터 1910년 까지 파리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야수파의 화풍을 포기하고 형들이 추종하고 있던 입체파의 화풍으로 전환을 하게 된다.

뒤샹은 아카데미 쥴리앙에서 잠시 미술수업을 받고 1905년 파리에 소재한 살롱 앙데팡당전에서 그리고 이어 상롱 섹시옹 도르 에서 입체파 화가들과 함께 전시를 가졌다.1911년 말부터 시도했던 뒤샹의 입체파적 회화들은 입체파 작가들을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그 첫 작품으로 쥘 라포그의 시" 여전한 스타"에 부치는 시화와 계단을 올라가는 누드의 모습을 명확하게 묘사한 드로잉 작품이었다.그의 첫작품들은 대부분 사실적인 작품들이었다. 이후 그는 라포그의 시를 위한 또 다른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제작하게 되는데, 1912년 9월 입체파 작가들과 함께 하는 "살롱 앙데팡당전"에 이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1912

당시 전시 주최측은 이 작품때문에 뒤샹을 제외한 다른 작가들을 소집한 비상회의를 가졌다. 뒤샹의 작업을 입체파들의 전시회에 걸 수없다는 몇몇 가지 문제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정물을 소재로 다루던 입체파 화가들에게 누드라는 소재가 문제가 되었고, 당시 이탈리아로 부터 불어 오던 미래파의 열풍으로 뒤샹의 작업은 속도를 표현하고 있는 미래주의 작업으로 읽혀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샹은 당시 미래파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후일 뒤샹의 이 작품을 보게된 미래파 작가들은 전통에 얽매인 낡아 빠진 작품으로 몰아 부쳤다.미래주의에 있어서도 기계와 속도에 대한 기대에 찬 희망이 전통적 소재를 다루는 뒤샹의 작업을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뒤샹의 형들은 제목을 바꾸던지 작품을 철수 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는 그날을 회고 하며 "형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곧장 전시회장으로 가서 작품을 떼어내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져갔다.그때가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그 일이 있은 후부터 , 그룹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파리에서의 반응과는 반대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는 뉴욕의 "아모리 쑈"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었다.뒤샹의 작품을 보기위해 연일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그러나 뒤샹의 작품이 누구에게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트리트는 "미용실에서의 혼란"이라고 비웃는가 하면 루즈벨트는 "나바흐 족의 깔개"에 비유했다.그러나 뒤샹의 캔버스에 나타나는 현기증나는 무질서한 움직임뒤에는 빛의 속력에 가까운 시간의 동시성이라는 개념들이 포함되어있다. 입체주의자들이 공간을 혼란스러운 요소들로 구성함으로써 공간의 동시성을 표현했다면, 뒤샹은 시간의 지속들을 억제함으로서 역설적이게도 물위의 바람을 그대로 있게 하였다.주1)

자전거 바퀴 1913

뒤샹은 어느날 의자위에 자전거 바퀴하나를 붙여 놓고 매우 기뻐하였다.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을 하기전에 뒤샹은 이 자전거 바퀴를 뱅글 뱅글 돌리면 무척 재미있다고 말했다.

병걸이 1914

뒤샹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손실되고 사라지고 없다. 심지어 남성용 변기인 "샘"조차도 스티클리츠가 재현한 것이다.위의 병걸이와 대부분의 레디메이드 들은 뒤샹의 놀이행위에서 창출된 것들을 본 사람들에 의해서 재현된 것들이다.뒤샹은 가급적이면 예술가의 행위가 개입되지 않은 순전한 선택으로만 예술이 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입체파 작가들에 의해 취사 선택되어 작품의 표면을 꾸미기 위해 희생 당했던 오브제의 자율성을 해방시켜 주었던 것이다.

위대한 유리 ("총각들에 의해서 발가벗겨지는 신부 조차도" 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1915-23 아래는 이 작품의 개념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뒤샹의 "위대한 유리(The grate Glas)는 두부분으로 이루어진 유리판위의 회화작업이다.위쪽은 신부를 표현한 부분이고 아래쪽은 총각들을 표현한 것이다.이 작업은 처음 뮌헨으로 여행을 떠날 당시 구상을 하게 되었는데,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나는 입체파나 움직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최소한의 움직임을 유화로 표현하려는 생각은 버렸다.말하자면, 당시의 모든 회화 경향에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이다.10여년 동안이나 회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싫증이 나게 된 것이다.나는 회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느낌이 열리는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늘 권태감을 느껴 왔다.회화작업 속에는 근원적인 만족을 느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티스를 비롯한 모든 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에 대하여도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말에는 손이라는 오래된 표현이 있는데, 이 말은 "예술가의 터치" 라는 뜻으로 예술가 각자의 고유한 스타일, 즉 예술가의 손을 의미하는 말이다. 나는 기술과 가시성만을 중시하는 회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내 주변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가시성만을 존중하는 작품들이었다.

내면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 라든가 정서 등은 완전히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작품들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존경했던 사람들은 목수나 장인 처럼 대형 그림을 그렸던 조르쥬 쇠라 밖에는 없었다.그는 마음내키는 대로 거리낌없이 손으로 작업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뒤샹은 당시 25세의 나이에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미술의 양식을 섬렵하고 곧바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그는 1913년 봄 부터 유리위에 그림을 그려야 겠다고 생각했다.그 방법은 파레트로 사용되던 유리판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그리고 유리의 반대편에서 나오는 색깔을 보았다. 만약에 유리에 그림을 그린다면 산화현상을 방지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처음에는 커다란 유리판을 사서 에칭 작업을 시작했다. 선안에 에칭을 그려 넣는 작업은 발생하는 열이 지독해서 지속하기가 힘들었다.그래서 다음으로 선택한 방법이 납으로 선을 만들어 유리위에 보호막을 입히는 방법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이 "위대한 유리'는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뒤샹의 작업실에 머물러 있었다.채색을 위해 사용한 안료도 그에게 있어서 무언가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는 유리판위에 먼지가 쌓이면 자기가 칠하고 싶은 부분에 아교를 조금 바르고 다른 부분들에 뭍은 먼지를 딱아내곤 했다. 그래서 이 작업에 사용된 안료의 색깔은 어느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뒤샹의 색이 되었다.1920년 만레이는 이 섬뜩한 달 분화구 처럼 생긴 뒤샹의 유리 표면을 사진으로 제작하였다.

뒤샹은 그가 "위대한 유리"를 실제로 완성한 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기 못했다.1963년 뒤샹은 그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것을 끝낼 필요를 못 느꼈죠.나는 때때로 그 미완성의 작품에서 ,당신이 완성된 작품에서 변화시키거나 완수 할 수 없는 또는 어떠한 다른 완성을 생각 할 수 없는 많은, 좀 더 많은 온기를 느낍니다.주5)

초현실주의를 이끌었던 앙드레 브르통은 이 작품을 논리성과 비논리성이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20세기 미술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그의 신비한 등대는 "하나의 문명이 종말을 고하는 시점에서 미래를 향한 항해를 인도하는 등대"라고 말했다.

1926년 브루클린 박물관에서 열린 "익명협회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이 유리 작업은 소장자였던 캐더린 드레이어의 집으로 운반되다가 파손되었다.뒤샹은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캐더린 드레이어를 위로해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이렇듯 난 숙명론자라고나 할까 구태여 불쾌한 일을 가지고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그는 1936년 깨어진 조각들을 모아 철틀로 조립을 하고는 보다 무거운 유리판 두장 사이에 안전하게 배치 시켜 복원을 하였다.복원된 작품은 손상되기 이전 보다 훨씬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거대한 유리는 지금 6개가 존재한다. 두개는 뒤샹의 살아 있을 적에 복제를 허락했고, 나머지 네개는 그의 아내의 허락으로 복제되었다.일본에 두개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웨덴에 두개의 복제품이 존재한다고 한다.

"샘" 남성용 변기 1917 스티클리츠 화랑 사진

20세기 현대미술에 가장 많은 혼동을 주었고 가장 많은 칭찬과 혹평을 동시에 들었으면서도 세인들에게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작업은 바로 위의 "샘"이라는 제목의 남성용 변기 작업이다.그는 1917년 자신이 창립했던 앙데팡당 미술가협회에 이 작품을 익명으로 죠셉 스텔라와 함께 보내게 된다.이 "샘"이라는 작품은 사기로 만들어진 변기를 거꾸로 해놓고 'R. Mutt'라고 서명을 한 작품이었다.당시 전시위원회는 6만 달러만 지불하면 전시를 할 수가 있다고 공언을 해놓고도 그의 작품을 보자 전시를 할수 없다고 거부하였다.그는 아렌스버그와 로쉐가 재정을 부담하고 자신이 편집한 단행본 소책자인 "맹인"에 이 사실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 무트가 직접 "샘"을 제작 하였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단지 변기를 오브제로 선택 했을 뿐이다.일상적인 평범한 물건을 택하여 새로운 제목을 정하고 새로운 시각을 불어 넣음으로써 변기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없애고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낸 것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만레이가 찍은 뒤샹의 여장 모습 사진

뒤샹의 어머니인 에밀 프레드릭 -니꼴은 뒤샹을 낳기전에 루이스라는 딸아이를 낳고 너무도 기뻐하였다. 위로 두 남자아이를 가진 뒤샹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이 딸아이는 특별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딸 아이 루이스가 어린나이에 병으로 죽게 되자 그 딸아이에 대한 상실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뒤샹의 세 살적 사진을 보면 뒤샹이 루이스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진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린나이에 병으로 죽은 누이 루이스의 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1920년경 뉴욕으로 돌아온 뒤샹은 어늘날 갑자기 사진을 찍던 만 레이에게 말했다." 내가 여장을 할테니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달라"고 말이다.뒤샹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곳에서 찾을 방도를 궁리하였다.이른바 제2의 정체성에 관한 탐구였다.자신을 여성으로 분장하고 다른이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함으로서 뒤샹은 다른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이 일때문에 성품이나 경력이 정상이었던 뒤샹에 대하여 온갖 심리적인 해석이 구구하였다.뒤샹 자신의 설명은 비논리적이다." 그때의 행동은 일종의 레디메이드적인 행위였다.처음에는 유태인 이름을 갖고 싶었다.그러나 마땅한 이름이 없었다.그래서, 문득 여자 이름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멎진 생각이었다! 성(성) 을 바꾸는 것이 종교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로즈는 이름이었고, 셀라비는 물론 프랑스어 세라비(C'est la vie)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로즈라는 이름에 R 자를 두번 표기한 것은 피카비아의 그림 " The Cacodylactic Eye" 라는 제목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주3)

"로즈 셀라비여! 너는 왜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 새장, 설탕막대, 온도기 1921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난해한 작품은 바로 위의 "로즈 셀라비여! 너는왜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 이다. 항상 동어반복적인 언어유희를 즐기던 뒤샹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레디메이드들을 융합해 하나의 말장난을 꾸며냈다. 지금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보관된 이 작품 보다 작품 제목에 있어 비논리적인 작품은 없을 것이다.이 작품은 새장 속에 설탕 막대 같이 보이는 (실상은 대리석)을 넣고 그 위에 온도계를 달아 놓음으로서 완벽하게 서로의 연관성을 타파 시키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작품의 제목을 정함에 있어서도 완벽한 비연관성 비논리성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아담( 뒤샹)과 이브(브로니아 펠무터 Bronia Pelmutter) 씨네 스케치의 한 장면

뒤샹은 많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다이스트 들과 교류를 하고 지냈지만 그의 진지하고 내성적인 성격때문에 좀처럼 남들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위의 도판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에서 만든 씨네 스케치라는 무대에서 아담의 역을 하고 있는 뒤샹의 모습이다.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 1916-1917

뒤샹은 샤폴린 에나멜 페인트 광고를 보고 레디메이드 작품으로서 광고 작업을 하게 되는데,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Apolinere Enameled)"라는 제목을 작품에 더해 주었다.뒤샹은 또한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거울에 소녀의 머리카락이 비춰진 모습을 그리면서 아무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워 하였다.주2)

뒤샹은 1923년 이후로 본격적으로 미술계의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거의 35년동안을 체스만 뚜면서 자신을 "숨 쉬는자"로 칭하며 생활 하였다.미술계에서는 그가 은퇴한 후에도 계속 작품을 제작 했다고 말하며 그것을 사기 행각으로 매도한다.그러나 뒤샹이 은퇴를 했다고 해도 은퇴 당시 뒤샹의 명성은 그가 손쉽게 떨쳐 낼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당시 초현실주의자들과 다다이스트 들은 뒤샹의 혁명적인 행동들에서 그들의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로 이해되기 어려운 새로운 것들이었다.그는 자신의 작업실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었고, 이후 세인들은 그것을 뒤샹의 예술품으로 숭앙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아래 뒤샹이 제작한 사채라든가,개인사 박물관 박스작업 따위가 그러하다.

뒤샹에 의해 발급된 사채 (뿔모양의 머리 를 한 뒤샹의 사진이 보인다.)1924

뒤샹은 1919년 그가 치과에서 치료를 받고 제법 그럴듯하게 그린 '치과 합병신용회사' 명의의 가짜 수표로 150달러를 지불하였다. 그러한 것을 보면 그는 다다신봉자 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뒤샹의 치과 주치의인 다니엘 트잔크 역시 의조문서를 받고 난 다음, 후일 뒤샹에게 많은 액수를 받고 되돌려 판것을 보면 그 역시 다다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이러한 행위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1925년 양친이 사망하자, 뒤샹은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을만큼의 유산을 상속받았다.뒤샹은 항상 자기가 생활하기에 가장 적당한 돈은 필요한 액수보다 10프로 정도의 많은 금액이라고 생각했었다.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924년 루울렛 놀이를 하면서 카지노에서 노름을 통해,사무직에서 일하는 사람이 수시간 동안에 일해서 벌수 있는 돈을 따게 되면서였다. 한 번은 몬테 카를로에서 자신의 경제원칙을 시험해 보다가 대출받은 돈을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머리에 비누칠을 하여 두개의 뿔모양을 만들어 목신처럼 보이게 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게 하여 멋진 '사채'를 발행하였다.위원회 의장이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이 사채는 지금은 꽤 값이 나간다. 뒤샹은 수주일 동안 몬테 카를로에서 루울렛 게임을 즐겼으나 원금만 겨우 건질 수 있었다 주 4)

1938년 국제 초현실 주의 전시를 열기전에 어울리는 전시회 분위기를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이 뒤샹을 찾았다. 뒤샹은 위의 도판처럼 실들이 엉기 성기 얽히고 설킨 전시회장을 재현 할 것을 조언 하였다. 20세기 미술사에서 이 전시는 최초의 설치형태의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읽혀 지고 있다.

1935년에 뒤샹은 자신의 미학이 들어 있는 일종의 개인 박물관을 작은 가방들 안에 만들기 시작했다.그는 소형서류가방 크기의 상자에 가죽을 씌우고 측면은 열린 상태로 두어서 자신의 회화, 레디메이드, 작품 68편을 소형으로 재생해서 보관하였다.그래서 매 작품 마다 각각 300점의 복제품을 만들었다. 파리에 있는 인쇄업자들과 고철상들이 제작한 복제품들을 서로 조합시켜 상자에 담아서 작품을 원하는 친구들에게 보냈다.'여행용 상자'라는 명칭이 붙여진 이 계획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으며 뒤샹의 의붓 딸이 1년에 30등급으로 나누어 조합하는 작업을 하였다.

뒤샹이 미술세계에 대단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5년전인 1963년 파사데나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게 되면서 였다. 이 회고전에는 드로잉, 그래픽, 광학장치,사진과 서명으로 작품이라고 지칭한 눈삽, 모자걸이 등의 오브제 모음외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와 실물크기로 제작된 "위대한 유리"등과 걸작 회회작품 19점을 비롯해서 총 114점이 전시 되었다.

뒤샹 죽이기와 영웅 만들기

뒤샹에 대한 현대미술 전반에 관한 견해는 아직도 많이 분분하다.196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팝 미술에 관한 세미나에서 보수적 성향의 비평가들은 " 뒤샹이야말로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과대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라면서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휴식시간에 자신에 대한 비난을 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 경박한 사람들은 아닌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윌리엄 드 쿠닝은 뒤샹에 대해 " 뒤샹은 움직이는 존재이다.그 움직임은 각 개인을 위한 움직임이며 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그런 움직임이다"라고 뒤샹을 칭찬했다.

뒤샹처럼 생전에 많은 이들로 부터 비판과 추앙을 동시에 받아본 예술가는 드물 것이다. 그는 그를 향한 우상숭배적인 행위들을 일제히 거부하고 그속에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려고 애썻다.자신의 지난 예술세계를 회고하는 파사데나 미술관의 전시에서 개관행사때 뒤샹을 미소를 머금은채로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레디메이드, 프린트물, 전시회포스터 등의 복제품에다 오전 내내 서명을 하고 즐거워 했다.고 리차드 해밀턴은 전한다.뒤샹은 그 모든 일을 끝내고 나서 해밀튼의 팔을 툭 치면서 " 나는 이렇게 서명하는 일이 좋다. 서명을 하면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 오늘날 수용되는 방법은 매우 쉽게 사라져 버린다. 화가들은 매우 질이 나쁜 염료를 사용한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작품을 제작한다.빠르게 제작된 예술, 이것은 입체파 이후로 금세기의 전반적인 예술의 특징이다.(중략)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 작품이 오랜동안 여유를 갖고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상업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만연되어있다. 수많은 화가들, 많은 개인전 , 게다가 이들 화가들의 배후에는 미술상, 수집가와 비평가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들 중에는 내동료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미술상이나 비평가들을 진정으로 신뢰 할 수가 없다. 지난 100년 동안 처음으로 화가들이 결탁하여 상업주의를 끌어 들였다.우리시대에는 예술가들이 하층계급에 속해 있었다.예술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상황을 즐겼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가들은 상업주의와 한 통속이 되어 댓가를 지불받으려고 들고, 팔기 위한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낸다" (마르셸 뒤샹)

앙리 피에르 로쉐는 그의 회상록에서 "뒤샹은 삶을 즐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아는 사람이었다."라고 적고 있다.뒤샹은 어떤 경우에도 "노우"라고 말하는 일이 드물었다.언제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엇던 사람이며 심지어 피카소 조차도 폴록에 대해서 좋지않은 감정들을 표현했는데, 뒤샹은 일절 다른 작가의 작업과 삶에 대해 관대했으며, 어떤 인터뷰나 어떤 질문에도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그렇지만 폐부를 찌르고 지적인 완벽한 해답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1968년 세상을 떠났다. 20세기의 전쟁과 아방가르드와 이즘의 변천사를 살아온 한 예술가의 삶 속에 숨겨진 예술에 관한 시종일관된 자세를 쫒는 즐거움으로 두서없이 타이핑을 했다.

아무쪼록 이 글이 뒤샹을 이해하는데에 많은 도움이 되어기를 바랍니다.

각주

주1)미술과 물리의 만남,레오나르드 쉴레인,김진엽 역,도서출판 국제,1995 273쪽 아래

주2)아방가르드의 다섯 노총각들, 칼빈 톰킨스,송숙자역,현대 미학사,1993 42쪽 중간

주3) 같은 책 49-50쪽

주4) 같은책 55쪽

주5)미술과 물리의 만남,레오나르드 쉴레인,김진엽 역,도서출판 국제,1995 279-280쪽

참고문헌

미술과 물리의 만남,레오나르드 쉴레인,김진엽 역,도서출판 국제,1995

아방가르드의 다섯 노총각들, 칼빈 톰킨스,송숙자역,현대 미학사,1993

현대미술의 문맥읽기,강태희,미진사,1995

Marcel Duchamp,Calvin Tomkins,Carl Hanser Verlag 1999(독문)

Marcel Duchamp,Thames and Hudson, 1995(영문)

백기영 (뮌스터 미대)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2001년 10월 작가연구 29호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관 ,갤러리,미술대학 학생들의 전시소식을 보내드립니다.

*발행원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홈페이지:http://members.tripod.com/k.pe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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