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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현대미술여행2001년10월 조이한의 이 여자가 보는법 1호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을 우리눈으로 읽고 우리의 시각을 찾고자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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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에로스

조이한 (베를린 미술사)

*옆의 그림을 클릭하시면 조이한의 "이 여자가 보는법"으로 연결됩니다.

몇년 전 파리에 들렀을 때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다. 1995년 10월 24일 부터 1996년 2월 12 일까지 퐁피두 센터에서 열렸던 "페미니마스쿨린"이란 전시회 카탈로그다. 340 페이지의 꽤 나 두껍고 큰 판형의 그 책은 온갖 성적인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었다. 품위 떨어진다고 도색잡지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던 나는 "예술"이란 고상한 표지안에 무척이나 적나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그 책을 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했다. 책을 미처 끝까지 들쳐보기도 전의 일이다.

집에 돌아와 좀 편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길 때다. 문득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무얼까 의문이 든 것이다. 도발적인 공연 예술이나 문학작품이 나왔을 때마다 한바탕 소동 벌이듯 논쟁이 되다가 별다른 산뜻한 결론 없이 흐지부지 사라지곤 하던, 그러나 나는 한번도 깊이있게 생각해본 적 없는 그 주제가 머리에 떠올랐고 이번에는 제법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문득 이 그림은 왜 여기 끼여있을까 생각되는 그림이 눈에 띈다.

그림1.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Concetto spaziale. Attesa. 1966

폰타나의 찢어진 캠퍼스다. 이 그림이 왜 그 책에 실려있는지를 깨닫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벌어진 틈, 인간 신체의 틈, 아, 거기. 하지만 이건 내게 뒤통수를 때리게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흔히 이 그림은 성적 이미지와는 상관없이 미술의 고전적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거론되곤 하던 작품이다. 이차원의 평면인 캠퍼스에 삼차원의 공간을 재현하기 위해 투시원근법을 어렵사리 발견한 화가들은 이렇게 표현된 가상의 공간을 마치 진리인양 찬양했다. 이 가상현실의 표현을 위해 수학적으로 치밀하게 계산하고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다듬고 노력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의 화가 폰타나는 이 문제를 캔버스를 찢어버림으써 아주 간단하게 풀어버린다. 팽팽하게 당겨진 캠버스의 표면은 날카로운 칼날이 닿는 순간 저절로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우연히도 인간의 성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재미있다.

그림 2. 로버트 라우셴버그. Robert Rauschenberg. Monogram. 1955-1959

이건 또 다른 책에서 찾은 작품의 사진이다. 거친 색채로 덧칠해진 바닥위에 우아한 뿔 달린 숫양 한마리. 숫양은 검은 타이어에 끼여 앞으로도 뒤로도 나가지 못한 채 불편하게 서 있다. 뭔가를 뚫고 나가는 어려움? 신화의 세계에서 과학 문명의 세계로 가는 과정? 자연 보호하자는 얘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게 한다. 그런데 이 작품 또한 성의 이미지와 맛닿아 있다. 오랫동안 숫양이 서구사회에서 남성 정력의 상징으로 쓰여왔음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이는 모습을 단지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외설"과 달리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는 게 "예술"일지도 모른다. 잠자고 있던 감각의 어느 부분을 순간의 시각경험으로 자작나무 떨림 보다 더 미세하게 작동하게 하는 것. 단 하나의 작품으로 여러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하고 생각의 실잣기를 하도록 하는 것.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것. 그게 예술일까? 그런것 같기도 하다. 잘 차려진 프랑스 요리와 패스트 푸드의 차이. 색과 모양, 냄새와 갖가지 맛의 조화, 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져 다양한 미감을 즐기게 하는 프랑스 요리와 단지 순간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먹는 햄버거의 차이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다.

그림 3. 구스타프 꾸르베. 세계의 기원. Gustave Courbet. L'Origine de monde. 1866

지금은 이것이 예술작품임을 부인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이 그림이 그려졌던 19세기 중반에는 감히 화랑에 걸 엄두도 못 냈었다. 성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던 당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망칙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관찰로 그려진 뛰어난 사실주의 작품임에는 틀림 없는데 이 그림이 우리의 다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제목과 연결해 보면 뭔가 거창해보이긴 하지만 앞에 예로 언급한 작품과 같은 은유나 상징성, 혹은 의미의 다층성은 약하다. 그럼 포르노그래피인가? 포르노그래피는 뭔가?

독일 청소년 보호법에 따르면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틱의 차이는 간단하다. 여성의 음순이나 남성의 발기된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이면 포르노그래피이고 그렇지 않으면 에로틱이라는 것 이다. 위의 정의에 따르면 꾸르베의 그림은 포르노그래피이다. 꾸르베의 그림 뿐만 아니라 서양 미술의 상당한 부분이 포르노그래피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화가들이 발기된 성기나 여성의 질, 섹스 장면을 얼마나 많이 그렸는지는 "페미니마스쿨린"이란 카탈로그에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가능한 모든 상상력, 심지어 무의식까지 예술의 대상이 되는 마당에 유독 "성"만 묘사하면 안된다고 금지하는 건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성기가 보이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외설"과 "예술"을 나누는 건 너무 단순한 논리다. 성에 대한 수많은 금기를 설정해놓고 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포하는 것도 좀 우습다. 그렇다면 여기엔 뭔가 다른 게 들어가야 한다. 다른 작품을 찾아보자.

그림 4. 캐롤리 슈네만. 아이 바디. Carolee Schneemann. Eye Body. 1963

흑백 사진이다. 비닐로 덮인 바닥에 여자가 나체로 누워있다. 그녀의 몸은 군데 군데 칠해져 있고 얼굴에도 선이 그어져있다. 먼 옛날 주술적인 의미에서 몸에 그림을 그리곤 하던 상황을 나타낸 것 같기도 하다. 그녀의 벗은 몸 위로 두마리의 뱀이 기어간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징그럽다거나 거부하는 표정이 없다. 시선은 관람자를 향해 있지 않고 사진의 틀을 넘어 그 어딘가 먼곳을 향해있다. 이완된 분위기, 입까지 살짝 벌린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편안해 보인다. 그녀의 표정, 시선 그리고 편안한 태도에서 성적 자극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나체사진이면 모두 포르노그래피를 생각하는 일반 상식과 조금은 어긋난다.

이것은 1963년 미국의 행위예술가 캐롤리 슈네만의 Eye Body 라는 작품이다. 그녀는 믿거나 말거나한 먼 옛날, 성의 차별이 없었다고 전해지는 때의 뱀 숭배정신을 작품 동기로 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당시 뱀은 영원한 재생산과 왕성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성성 과 더불어 숭배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애를 낳는다거나 수유의 행위가 여성이 차별받아야하는 조건과 연결되지 않았다. 여성의 몸이 오직 남성 성욕의 대상으로만 간주되기 전의 얘기다.

캐롤리 슈네만은 다음해인 1964년 남자친구인 제임스 테니와 함께 22분짜리 퓌지스 Fuses 라는 영화를 만든다. 그녀 자신이 감독을 하고 직접 출연한 이 영화는 자신이 남자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얼마 전 이와 비슷한 필림이 돌아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필림의 주인공은 의도하지 않게 필림이 세상에 노출되어 문제가 되었지만 캐롤리 슈네만은 의도적으로 사랑의 장면을 찍었다. 그 필림에서 의도했던 것은 성적 욕망과 성적 만족의 해방이다. 특히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대상이며 억눌러야하는 것으로 알려진 "여성의 성적 욕망과 만족"을 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 성이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다른 한 성을 대상화하거나 물화하지 않는다. 마치 한바탕 축제처럼 진행되는 섹스. 여기서 포르노그래피와 예술의 차이중 한 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예술이 뭐냐를 논하는 것은 아주 애매하고 힘들다. 예술개념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으며 자꾸만 경계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경계허물기,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예술 속성 중 하나라면 개념 정의가 힘든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예술이 뭔지를 알아내서 포르노그래피와의 차이를 규정하는 것 보다는 포르노그래피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캐롤리 슈네만 작품과 연결해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몇가지 생각들을 정리해보면 그 중 몇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체의 벗은 몸이나 성기 부분, 혹은 성애 장면을 그렸느냐 아니냐, 즉 대상의 문제로 예술 과 포르노그래피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을 어떻게 묘사했느냐가 중요한 테마가 된다. 기존의 포르노그래피는 성애장면을 묘사했다는 데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이로 인해 한 성이 대상화 혹은 상품화되고 있다는 데서 문제가 된다. 기존의 상업 포르노 그래피가 다루고 있는 내용 중 수간, 어린이 성의 착취, 갖가지 변태적 행위, 강제된 성 등 의 묘사를 통해 어떤 선입견이 반영되고 다시금 유포된다. 여성은 피학적인 성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남성의 성은 제어할 수 없다는 신화, 여성은 유혹되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생각하고 남성은 공격본능을 가지고 있다, 혹은 여성에게는 성욕이 없다거나 심지어 강간당하고 싶어한다는 폭력적 고정관념의 유포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다. 오랜 남성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일 뿐이다. 이런 잘못된 성관념은 남성에게만 고정 되는 게 아니라 여성에게도 전염된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자기상을 스스로 내면화하는 거다.

포르노그래피가 기존의 "성 역할" 혹은 "성 정체성"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고정시킨다면 캐롤 리 슈네만의 작품은 이미 있던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성은 빼앗거나 뺏기는 게 아니라 서로 나누는 거고, 여성은 자기만의 성적 이미지와 욕망,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의 성을 대상화, 물화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표현한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새로운 주장에 속한다니 좀 허탈해지지만 이건 미국의 60년대 얘기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금 20세기 가장 끝무렵의 얘기이기도 하다. 예술이 시대를 뛰어 넘으려는 시도이고 가치 뒤집기를 하는 거라면 캐롤리 슈네만의 작품은 분명 포르노그래피와 구분되는 예술작품이다. 하지만 이때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그녀는 "아이 바디"라는 작품에서 여성의 몸을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포르노그래피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고 한다. "여성에게 자연적인 에로틱을!". 이 작품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본 많은 관람자들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작품이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섹시하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을 오직 "예쁜 얼굴과 죽이는 몸매"의 기호로만 보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처럼 아무리 작가가 "여성의 몸을 포르노그래피에서 해방"시키려는 목적으로 작품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성 차별적으로 코드화된 사람의 시각에서 이 작품은 포르노와 구별되기 힘들다. 기존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면. 현대 미술은, 특히 여성의 시각에서 세계를 다시 보려는 시도를 하는 여성주의 미술은 이렇게 이미 고정화된 코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조이한(베를린 미술사)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2001년 10월 조이한의 이 여자가 보는법 1호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관 ,갤러리,미술대학 학생들의 전시소식을 보내드립니다.

*발행원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홈페이지:http://members.tripod.com/k.pe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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