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your own free website on Tripod.com

독일의 현대미술여행2001년7월 현대미술사 29호 요셉보이스의 FIU에 관하여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을 우리눈으로 읽고 우리의 시각을 찾고자 고민합니다.

|메일메거진 추천 |구독해지 |작가연구 |방명록 |예술가 클럽 |독일의 한국작가 |메일메거진 지난호보기

현대미술사 29호 요셉보이스의 FIU에 관하여

백기영 (뮌스터 미대)

요셉보이스처럼 현대미술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가도 드물다.그가 생전에 남긴 많은 행위와 진지한 연설들은 그의 광적인 기질과 함께 현대미술의 지워지지 않는 신화가 되었다.1986년 그가 사망한 이후로 미술사가들과 그의 예술세계에 깊이 매료되어 있던 "보이스 추종자"들은 보이스를 다시 발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1991년 바젤에서 보이스의 예술세계를 주목하는 회의가 있었고, 이후 1995년 보이스 심포지움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분석하고 있다.같은해에 있었던 보이스의 파리 퐁피두쎈터 전을 지켜 본 필자에게는 특히 이 시간이 새롭게 다가온다.보이스의 퐁피두 입성도 이러한 학계의 노력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으리라.크라넨 부르크에서 있었던 보이스 심포지움의 여러가지 테마중 국제 자유미술대학에 관한 보이스의 생각들을 읽어 보고자 한다.

그의 국제 자유미술대학의 설립과 정치적인 활동은 척박한 국내 미술교육 환경에서 작가들에게 던져주는 미술교육과 "작가로서 살아가기"에 대한 교훈이며,총체적인 "삶으로서의 예술""사회조각"의 확대된 예술형태들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국제 자유미술대학설립,아이디어와 영향

FIU는 국제적인 연구단체중에 하나이다.이 단체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 수가 얼마 않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FIU에 가지 못합니다.여기에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저편에 있는 "사회에 대한 계획Gesellschaftentwurf"이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99쪽,카타로그 뒤쎌도르프 1987,"Brennpunkt Duesseldorf:1962-87도미니퀴에 퀸틴 1985년 3월10일 요셉보이스,)

이 국제 자유미술대학은 (FIU)는 1971년 요셉보이스에 의해서 국립 뒤쎌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안에 설립되었다.창립 당시 개설된 수업은 우선 학생들이 (단지 학생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사용해야만 하는 설비들을 철두철미하게 계획하였다.그것은 폭넓게 학생들의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었다.이러한 생각이 나오게 된 계기는 쿤스트 아카데미내에 공간부족 문제가 시급했기 때문이다.그것은 요셉 보이스의"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 모두를 위한 정신적인 삶"이란 주장이 자연스럽게 쿤스트 아카데미안에 많은 학생들을 받아 들이게 되었고,쿤스트아카데미의 정원이 훨씬 넘어서는 학생들이 보이스 아래로 몰려들었다.그래서 학교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1973년 설립된 교수연합(사단법인 창조성과 범학문적인 연구를 위한 국제자유대학)은 소위 인지이론,사회과학,경제학,생물학과 진화론적 과학 처럼 비예술적인 훈육,과 연관되어 있었다.특히 발기자인 하인리히 뵐이 아주 강력하게 이끌던 예법과 대화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곳 아카데미.

보이스는 1961년 처음으로 뒤쏄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의 교수로 초빙된다.그의 초빙 당시 마패에는 드로잉과 조각들로 이루어 져있었다고 한다.보이스가 뒤쎌도르프의 쿤스트 아카데미로 초빙되면서 부터 학교는 시종일관 엄청난 사건들이 휘몰아 쳤다."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고 주장했던 보이스는 말로만 그의 주장을 지속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교수로서의 삶"과 "교육자로서의 예술가"상을 이 학교를 통해 실천했던 것이다.그는 "내가 있는 곳이 곳 아카데미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보이스의 교육자로서의 예술가상을 아주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1972년 10월 10일 보이스는 54명의 학생들과 함꼐 뒤쎌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의 사무실을 점거했다.겨울학기에 신입생 입학 시험에서 낙방한 125명의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 54명의 학생들을 끌어 모은 보이스는 이들에게 학생증을 줄 것 을 요구하였다.만약에 이것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보이스는 이들과 함께 14일 동안을 점거 할것이라고 협박했다.당시 노드라인 베스트 팔렌의 주정부 교육부장관으로 일하고 있던 요하네스 라우(당시 기라성같은 정치적 유명세를 얻고 있던 정치유망주와 보이스는 숙명적인 정치적 만남을 가지게 된것이다.요하네스 라우는 지금 독일 전체 연방 프레지덴트로 있으며 븐데스 칸츨러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정치적인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면 라우는 상징적인 존재로 독일의 화합과 연방체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에 강경책으로 대응해 나왔고, 보이스를 해직하도록 명령했다.

그도 그럴것이 보이스가 교수로 재직한 이래로 뒤쎌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는 지속적으로 재학생수가 증가했다.당시 각 반에 최고 30명이상의 학생을 받아 들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스의 반은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문제가 생긴 1972년만해도 227명의 학생이 지원을 해 125명이 낙방을 한 셈이었고, 학생수가 1052명을 넘어섰다.(지금 뒤쏄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정원도 대략 600여명에 불과하다.)그중 268명이 보이스의 반에 등록 되어 있었다.

이와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경직된 제도적 시스템으로서 학교가 이것을 수용하거나 말거나 보이스는 "보이스= 아카데미" 라는 기본적인 자신의 예술적 강령을 잃지 않고 있었고, 그렇게 많은 전시와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상 자신의 교육적 이상을 실현시키는 그의 프로젝트에 충실해 있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을 차후 국제 자유대학의 설립에 까지 이르게 된다.1972년 사태가 일어나기 한해전 이미 뒤쏄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는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는데,232명의 지원자중에 142명의 낙방한 학생들을 보이스의 반으로 이끌려는 논쟁이 있었다.이 당시에도 많은 다른 교수들의 반발과 주정부의 반발로 이미 보이스가 자신의 반으로 끌어들인 142명을 대상으로 학생증을 발급하지 않자,보이스는 사무실을 17명의 학생과 함께 점거했었다. 결과는 이 142명중 점거에 동참한 17명만을 대상으로 학생증을 발급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보이스는 이것이 초래하는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학생수가 많아지면 학교의 시설은 부족하고, 교수도 필요하고,많은 부분에 장애가 생긴다.그러나 독일기본법에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모든 사람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하지 않는가?또 교수에게는 어떤 것이든 가르칠 권리가 있지 않은가?이러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현실적 장애로 실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시스템에 대한 맹목적인 저항과도 같은 것이었다.그해 요하네스 라우는 "보이스는 그늬 미치광이 짓거리로 이정도면 많이 돈을 벌었다. 이제는 끝을 낼때가 됐다."라고 종지부를 찍었다.독일내에서는 예술가와 정치가의 대립사건은 1933년 클레의 경우 이후 보이스를 든다.클레는 순종적으로 굴복하고 말았던 정치가와의 싸움에서 보이스는 물러 나지 않았다.

보이스는 주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인다.그러나 상황이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그의 11월 11일 법적심판에서 그는 "여러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점거를 지속한 그의 명령 불복종은 유예없는 해고의 당연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판결났다.11월 13일의 공판도 무산으로끝나고 이듬해 2월21일 법정의 결정은 "고용자는 고용자를 상대로 공격적인 목적으로 고용자의 물건이나 장소등 집기등을 점거 파손하는 자를 예고없이 해직시킬수 있다."로 났다.

이 심판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보이스는 이 사건을 다시 1978년 카쎌의 연방노동법무청에 심판을 의뢰했다.여기서 연방노동법무청은 "노드라인 베스트 팔렌의 주정부가 쿤스트 아카데미 교수 보이스를 상대로 내린 유예없는 해고의 결정은 위법이다.1972년 사무실 점거를 위한 보이스의 행위는 어떤 잘못된 목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자신의 54명의 학생에 대한 교육의 권리를 찾아 주려는 노력에 불과했다.이러한 교수의 노력에 대한 주정부의 해고는 불법이다."이 사건은 보이스의 승리로 끝났다.

국제 자유대학의 설립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저는 그저 예술에 대해서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보이스의 증언은 정말 그의 말 그대로 진실이 담겨있는 말이다.그는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확장된 예술개념"에 다가간다."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행위는 가장먼저 예술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이해 가능합니다.정치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예술이죠,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창의적인 힘을 내쏟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보이스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나는 아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정치적으로 일하는 것이 일상적인 사람들의 노동과 같은 것입니다."엄밀하게 말하면 보이스는 무정부주의자다.특히 민주주의의 한계를 전폭적으로 개혁하려는 그의 노력들에서 더욱그러했다."진짜 정치가"가 보이스를 볼때,그는 사기꾼이거나 미치광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초기 "녹색당의 이데올로기"의 주창자 중에 하나인 루카스 벡크만은 다음과 같이 보이스에 대해 말했다."보이스는 일상을 다루는 정치가가 아닙니다.그의 말들을 공허하고 우리가 애써 노력해서 바꾸어야 할 일상의 현실과는 아주 동떨어 집니다."그런 보이스의 생각들은 초기 "녹색당"의 이념에 아주 많은 영향을 주었고,"초기 독일 녹색당 운동의 아버지"로 보이스를 이해 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와같은 보이스의 정치적인 예술개념은 1967년 "학생정당(Studentenpatai)"의 결성에서 벌써 태동되기 시작했다."나는 분데스 탁(Bundestag)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 보이스는 이 학생정당을 결성하면서 부터 자신의 실기실에 학생들과 함께 공개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지속적인 행사들을 만들어 갔다. 특히, 보이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이러한 공개 토론회는 아주 필수적인 것이다.이 학생정당의 긍극적인 목적에 대해 보이스는 "민족주의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해체,유럽과 세계의 통합,동과서의 대립해소,새로운 역사관에 대한 연구,세계경제,세계법,세계 문화를 위한 교육과 연구,"를 내세웠다. 당연히 여기서도 "보이스의 확장된 예술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보이스는 이 "학생정당"을 "반 정당을 위한 정당"으로 "메타 정당"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대부분의 정당원은 동물로 구성되어 있다."으로 이해했다.1968년 정당 결성 1년후, "학생정당"은 "플럭서스(Fluxus)주1)의 서부지역 모임"정도로 되어 버렸다.

1970년 3월 2일 보이스는 일회적으로 만들어진 임대사무실을 빌려 뒤쏄도르프에 "사단법인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자유선거"를 위한 안내쎈터를 설치했다.여기에 200여명의 회원이 모여들었다.1970년 6월14일 보이스는 노드라인 베스트팔렌의 주정부선거에서 선거거부를 호소했다."다시는 정당에 투표를 하지말자!""왜냐면 정당은 언제나 경제 재벌들의 이해관계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다수의 생산력을 착취한다.그러나 인간의 권력은 스스로를 확증함의 권력으로 부터 온다.당신들은 당신들 스스로를 통치하시오!"

1971년 6월 1일 보이스는 "사단법인 자유 민중발기 단체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단체"를 결성하였다.그리고는 1972년 토큐멘타 5에서 보이스는 "100일동안의 강연"을 통해서 민주주의,예술 그리고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해 관람자들과 대화를 진행해 나갔다.아침 이른 시간 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100일을 지속한 그의 강연은 카쏄도큐멘타를 지속적으로 실험적인 세계의 미술행사로 남게하는 힘이되었다.이 행위는 작가 스스로를 하나의 조각으로 인식하게 한다.말하고 있는 조각이며,철학을 사유하는 조각이며,선포하는 조각인 셈이다.

그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을 그렇게도 역설하였으나 정치적인 현실은 그의 이상을 무시하고 도도하게 그의 갈길을 가고 있었다.1976년 10월 3일 여덟번째 분데스 탁에 AUD(자율적인 독인인을 위한 행동단체)의 전단이 뿌려졌다.여기에는 보이스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드디어 무언가 새로운것이! 자유로운 문화!자유로운 민중대학! 50% 여성을 의회로 !투표하시오 ! 무소속의 AUD의 후보자! 요셉 보이스 교수,선거구 74 뒤쎌도르프 기호1번!"그는 뒤쎌도르프 -오버 카쎌 선거구에서 600표를 받아냈다."이것은 엄청난 결과입니다."라며 마치 왕이라도 된것 처럼 기뻐하였다.

1979년 유럽의회선거에서 보이스는 "녹색당의 후보자"로 선거에 참여 하였다.여기에는 천하무적의 보이스의 모습이 찍힌 포스터가 나붙었다.결과는 참패로 끝났다.이후 1980년 분데스탁선거전에서는 노드라인 베스트 팔렌의 주의원 녹색당리스트에 1위로 올랐다.

주1) 플럭서스는 ,"흐르다"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가져온 단어로 예술과 삶의 경계를 차단하고 넘나 흘러드는 것을 이상으로 한 실험미술단체,

참고문헌

라이너 라프만(Rainer Rappmann)국제 자유미술대학 (Die Freie Internationale Universitaet(FIU))설립,아이디어와 영향,1995년 크라넨 부르크에서 있었던 요셉보이스 심포지움의 29번째 강좌.

요셉 보이스 ,하이너 슈타헬 하우스,Econ& List Taschenbuch Verlag,1991.의 99쪽-158쪽,보이스의 뒤쏄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교수직과 해직,그리고 자유대학설립에 관한 전기.

백기영 뮌스터 미대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2001년 7월 현대미술사 29호 요셉보이스의 FIU에 관하여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관 ,갤러리,미술대학 학생들의 전시소식을 보내드립니다.

*발행원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홈페이지:http://members.tripod.com/k.peik

|메일메거진 추천 |구독해지 |작가연구 |방명록 |예술가 클럽 |독일의 한국작가 |메일메거진 지난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