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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현대미술여행2001년 2월 작가연구 14호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을 우리눈으로 읽고 우리의 시각을 찾고자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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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라우흐(Neo Rauch)-변웅필(뮌스터 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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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잘 아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화가의 무기를 가지고...독일 라이프찌히 태생의 화가 Neo Rausch에 대하여(상)"

bild1:"계곡"(200x250cm.1999)

하늘은 높다. 전봇대는 하늘을 찌른다. 농가와 공장들은 텅 비어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에는 차량이 없다.라이프찌히 근교의 풍경은 Neo Rauch의 어느 그림속으로 스며든다. 1960에 태어난 화가 Neo Rauch가 붓을 잡으면, 어느 도로인가는 교통이 중단되고,가로수로 이어진 길은 공허속으로 사라진다. 어떤 능숙함도 전선의 정리된 구조와 길과 들판들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즉물주의(Sachlichkeit)와 초현실주의(Surrealismus)는 Neo Rauch에게 상호적으로 관여되지 않는다. Neo Rauch의 그림들은 혼란하지못해 심란하기까지 하다. 비록 그가 꼭 그런 경향때문 만은 아니지만 그는 성과를 거두었다. 독특한 회화와 예술시장이 몇년 전부터 호황인 미국에서 더욱 그렇다.그의 작업을 수집하는 이들은 그의 전속갤러리의 Gerd Harry Lybke로 부터 그의 작업을 남김 없이 사들인다. 더불어 이곳 독일에서도 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Rausch는 예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라이프찌히의 현대미술관 두층 모두에서 전시하는 기회를 얻은 이후 몇달간 많은 관람자에게 알려질 것이다.

bild2:(134x192cm.2000)

그의 전시는 라이프찌히에 이어 뮌헨, 쮜리히, 만하임, 베를린, 그리고 다시 라이프찌히에 이어 계속 전시 될 예정이다. 이제까지 스스로 외소하게 느끼왔던 한 예술가,그리고 오랜시간 동안 문화계에서 동쪽의 외부초소로만 여겨져 왔던 그의 고향 라이프찌히가 이제는 국제적인 관심에 휩싸였다. 작센주는 휴일과 같이 고요하고, 라이프찌히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상관없다.우리는 어떻든 간에 복무에 들어 갔을 것이다."여기서 "복무"라 함은 그의 아틀리에 책상위에 놓여 있는 총과 함께를 말함이 아니고 라이프찌히 동쪽의 소도시 Plagwitz에 있는 목화 방적 공장의 아틀리에에서의 작업을 말함이다. 이 공장은 1989년 변환기때에 작업이 중단되고 기억을 위한 보존건물로 지정되었다. 그 건물 일부분을 약 30명의 예술가들이 임대하여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이 가스총은 여름에 과일위에 앉아 있는 벌레들을 잡기위해 사용한다"라고 그는 말한다. 벽에 걸린 표적판에는 몇개의 총구가 보인다, 라이프찌히 화가들의 대부분그림들은 전쟁에 대한 경향을 띠고 있다. "해군학교"또는"작전"이란 전시제목을 뤼벡이나 라이프찌히의 전시에 사용하였다. 이 전시에서는 탱크나 비행기들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총기가 그려진 어떤 그림은 하필 1963년 미국대통령 John, F, Kennedy 가 암살당한 미국 Dalls의 한 미술관에 팔렸다. 여기 그림속에 누군가 자신의 병역생활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누군가가 있는가? "우리의 일상용어는 완전히 군대개념으로 가득차있고, 20세기 예술도 Avantgarde부터 오늘날 유행하는 Intervention까지 군사적인 용어로 무장되어 있다. 아마도 군사적인 특수용어가 더 높은 조형성을 가진 정확한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Rausch는 말한다. 그는 軍을 그리면서 예술내에서도 항상 새로운 것으로 인정받으려 앞으로 나서는 전위예술의 전투적인 드러남을 비웃는다. "NEO", "새로움"을 뜻하는 그의 이름을 그는 차라리 전통이나 완만함을 위한 "고집"으로 여긴다는 뜻으로 "나는 페라리 자동차로 이동중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탱크나 굴착기,공장 그리고 작업장은 모든기술을 가진 한 소년의 매혹을 이야기 하며 그는 그의 어린시절을 돌이킨다. 60년대 동독에서는 술래잡기같은 아이들의 놀이가 "작전"이라고 불리어 졌었다. 그 당시 그는 그의 부모가 그가 태아난지 6개월만에 기차사고로 인해 사망한 이후로 새로 지은 한 단지에서 그의 할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보냈다. 그는 여름에 도로의 Teer(타르)가 물렁해지면 그것을 때어내서 버터를 바르지 않고는 손을 닦을 수 없을 때까지 검고 작은 인간상을 만들곤 했다 한다.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Teer도 이 시절에서 연유한다: 두꺼운 Teer가 건물 모형에서 부풀어 오른다.

bild3:"위치"(200x250cm,2000)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꿈처럼 무의식속에 솟아오르고 다른 인식들과 환상적인 모습들 속으로 섞이며 화폭위에 오르길 요구한다. 이러한 것들을 그는 "눈썰미 그림"이라고 부른다. 이런기억의 화면들은 언어를 통해 잡아두려 해도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의 화면들을 인물이나 사물로 표현하는것이 Neo Rausch에게는 추상을 요구하는 이 현시대 속에선 큰 어려움였다. 그는 처음 Werner Tuebike에 감탄했고, Arno Rink에게서 수업을 받았으며 이후 Bernhard Heisig의 제자로 공부했다. 처음에 표현적인 작업을 했고, 그후 인포멜의 대표자라도 된듯 온몸으로 작업을 하며 낯선 스타일에 도취감을 느끼곤 했다. 확실한 것은,,, 처음의 난무한 색과 격한 붓놀림에는 1980년대 동독의 암울한 부동적임에 대한 반항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격동적이고 망설임 없이 보일수록 자신만의 길을 가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에게 더해져 갔다. "나에게 이것은 어떠한 완벽함도 가져다 주질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이건 확실했다. 나에겐 완벽한 추상이란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말이 많다."라고 그는 말하며 덧붙히기를..."나에겐 삼각형의 창조자 보다는 어느날 집으로 가는 한 형상의 창조자로서가 나에게 더 만족을 가져다 준다." 그림들과 움직임들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파블로 피카소.게오르그 바젤리츠. 마쿠스 뤼페르쯔 등 20세기 후반의 구상회화의 전통이 자극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대학수업 첫해에 데이비드 호크니의 팜플렛이 반(Klasse)에 돌았다. 그 영향으로 그는 잠시 팝아트에도 손을 댔었다.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라고 한다. 1988년 그가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보았을때 그 야생적이고 절대적인 형상앞에 할말을 잃었었다. "왜냐면 한 어린 촌놈이 그 위대한 노장앞에서 놀란 것이다" 경렬한 결합이 시작되었다. Rausch는 그 영국작가의 그림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전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로 꼽히던 Ilja Repin의 초상화나 역사화를 모방하듯이... "당시 동독에는 서양의 미술시장과 같은 분주함이 없었다" 라고 Rausch는 회상한다. "그때 나는 나만의 길을 연구하기위해 끊임없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1990)중 Assisi의 기오토의 프레스코화와 Roma의 발투스의 회화는 또 하나의 결과물을 낳았다. 그때도 그가 자신만의 엄격한 어휘를 정확히 표현된 형상과 사물을 통해서 발전시키기위한 확고하고 엄격한 시기였다.(계속)

변웅필 (뮌스터 미대)필자들을 위해서 격려의 메일을 부탁 드립니다.

다음호에 네오 라우흐의 하편이 계속됩니다.이 글은 아트지 2000년 1월호-게르하르트 막의 글을 완역한 것입니다.이 번역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필자의 허락없이 복제하거나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면 저작권에 위배됨을 밝힘니다.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2001년 2월 작가연구 14호

*독일의 현대미술여행은 독일의 미술관 ,갤러리,미술대학 학생들의 전시소식을 보내드립니다.

*발행원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홈페이지:http://members.tripod.com/k.pe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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